객체지향은 실제 세상의 모방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객체지향을 처음 마주할 때 실제 세상의 모방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즉 객체지향 소프트웨어가 실세계의 투영이며, 객체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추상화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것은 틀렸다.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면서 객체에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실제 세상의 사물을 발견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부분..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ㅋㅋ)
방화벽이 화재의 확산이 아닌 네트워크 침입을 막는다고 문제가 될까?
실제 세상의 방화벽이 건물과 연관돼 있다고 해서, 네트워크 방화벽이 건물과 연관될 필요가 있을까?
소프트웨어 방화벽과 건물의 방화벽 사이의 의미적 거리만큼이나 소프트웨어 객체와 실제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은 희미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위와 같은 설명을 많이 듣는 것은 실제 세상에 대한 비유가 객체지향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학습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객체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현실 세계의 생명체에 비유하는 것은 상태와 행위를 캡슐화하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자율성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다.
현실 사람들이 암묵적인 약속과 명시적인 계약으로 협력하며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과정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객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역할, 책임, 협력
책에선 주문을 하는 손님, 주문을 받는 캐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예로 들며 역할 / 책임 / 협력에 대해 설명한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복잡해서 혼자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request)한다.
요청을 받은 사람은 필요한 지식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며 요청에 응답(response)한다.
요청과 응답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협력(collaboration)하므로 인간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든다.
협력의 성공은 특정한 역할을 맡은 각 개인이 얼마나 요청에 성실히 응답하는가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과정 속에서 특정한 역할(role)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카페에선 손님, 캐셔, 바리스타라는 역할이 존재한다.
역할은 어떤 협력에서 특정한 사람이 차지하는 책임이나 임무를 의미한다.
위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역할이라는 단어는 의미적으로 책임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객체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성실한 객체 시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시스템의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객체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사람들의 협력이 객체들의 협력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들의 경우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데 비해 객체들의 경우에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점이다.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은 더 작은 책임으로 분할되고 책임은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객체에 의해 수행된다.
결론적으로 시스템은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는 객체로 분할되고 시스템의 기능은 객체 간의 연쇄적인 요청과 응답의 흐름으로 구성된 협력으로 구현된다.
객체와 사람의 역할이 갖는 유사한 특징
- 여러 객체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캐셔가 그만두더라도 새로운 캐셔를 고용하면 그만이다)
- 역할은 대체 가능성을 의미한다. (위와 비슷하다. 결국 누가 수행하든 역할만 잘 수행하면 그만이다)
- 각 개체는 책임을 수행하는 방법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바리스타가 라떼 아트로 하트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 하나의 객체가 동시에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캐셔와 바리스타를 한 사람이 할 수도 있잖아!)
객체
객체지향 애플리케이션의 윤곽을 결정하는 것은 역할, 책임 협력이지만 실제로 협력에 참여하는 주체는 객체이다.
아주 작은 기능조차도 객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객체는 다른 객체와의 협력을 통해 기능을 구현하게 된다.
객체의 두 가지 덕목
1. 객체는 충분히 `협력적`이어야 한다.
객체는 다른 객체의 요청에 귀 기울이고, 다른 객체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
외부의 도움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하려고 하는 전지전능한 객체(god object)는 내부적인 복잡도에 의해 자멸하고 만다.
2. 객체는 충분히 `자율적`이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충분히 협력적이어야 하지만 수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객체의 요청에 객체가 스스로 판단하여 응답해야한다는 것이다.
자율적이라는 단어의 뜻은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여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진다면 우리는 그 사물을 자율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객체지향 설계의 묘미는 다른 객체와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방적인 동시에
협력에 참여하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율적인 객체들의 공동체를 설계하는 데 있다.
객체의 자율성은 객체의 내부와 외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객체의 사적인 부분은 객체 스스로 관리하고 외부에서 일체 간섭할 수 없도록 차단해야 하며,
객체의 외부에서는 접근이 허락된 수단을 통해서만 객체와 의사소통해야 한다.
객체는 다른 객체가 무엇(what)을 수앵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떻게(how)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커피를 주문하는 협력 과정에서 손님, 캐셔, 바리스타는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율적 존재였다.
흔히 객체를 상태(state)와 행동(behavior)을 함께 지닌 실체라고 정의한다.
커피를 제조하는 바리스타가 제조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객체가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상태를 알지 못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객체가 협력에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율적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필요한 행동과 상태를 함께 지니고 있어야한다.
과거의 전통적인 개발 방법은 데이터와 프로세스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이에 반해 객체지향에서는 데이터와 프로세스를 객체라는 하나의 틀 안에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자율성을 보장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개발 방법과 객체지향을 구분 짓는 가장 핵심적인 차이다.
자율적인 객체로 구성된 공동체는 유지보수가 쉽고 재사용이 용이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메시지, 메서드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소통하는 인간과 달리 객체지향의 세계에서는 한 가지 의사소통 수단만이 존재한다.
이를 메시지라고 한다.
객체는 협력을 위해 다른 객체에게 메시지를 전송하고 다른 객체로부터 메시지를 수신한다.
객체가 수신된 메시지를 처리하는 방법을 메서드(method)라고 부른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메서드는 클래스 안에 포함된 함수 또는 프로시저를 통해 구현된다.
따라서 어떤 객체에게 메시지를 전송하면 결과적으로 메시지에 대응되는 특정 메서드가 실행된다.
메시지를 수신한 객체가 실행 시간에 메서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프로시저 호출에 대한 실행 코드를 컴파일 시간에 결정하는 절차적인 언어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메시지와 메서드의 분리는 협력에 참여하는 객체들 간의 자율성을 증진시킨다.
바리스타에게 전달된 커피 제조 요청이 메시지이고 커피를 제조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메서드다.
캐셔는 커피가 제조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바리스타가 커피를 제조하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리스타는 커피 제조라는 메시지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만의 자율적인 방법에 따라 커피를 제조할 수 있다.
외부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메시지와, 요청을 처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인 메서드를 분리하는 것은
객체의 자율성을 높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이것은 캡슐화(encapsulation)라는 개념과도 깊이 관련돼 있다.
흔히 객체지향을 이야기하면 클래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는 불어나는 헛소문처럼 잘못된 통념이다.
지나치게 클래스를 강조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적인 관점은 객체의 캡슐화를 저해하고 클래스를 서로 강하게 결합시킨다.
훌륭한 객체지향 설계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할 첫 번째 도전은 코드를 담는 클래스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객체의 관점으로 사고의 중심을 전환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클래스가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떤 객체들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협력하는가다.
클래스는 객체들의 협력 관계를 코드로 옮기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클래스들의 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메시지를 주고받는 객체들의 동적인 관계를 생각하자.
클래스의 구조와 메서드가 아니라 객체의 역할, 책임, 협력에 집중하라.